영상 통화가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 간의 의사소통을 더욱 실감나게 전해 주듯이, 텔레프레즌스(telepresence, 원격존재)는 생산성 도구로 기업활동에 도입되어 왔습니다. 텔레프레즌스는 “기존 비디오 컨퍼런스(영상 회의) 시스템의 기능을 확장하여 마치 앞에서 대면하여 회의하는듯 한 실감형/실물형 영상회의서비스” [1] 로 정의됩니다. 단순한 영상 뿐만 아니라, 촬영되는 대상의 움직임 등까지 전송되면서, 커뮤니케이션에 참여하는 상대에게 더욱 몰입감을 제공해 주는 역할입니다.
한발 더 나아가, 텔레프레즌스 로봇은 개인의 활동 자체를 전송하는 역할을 합니다. 사용자가 원격의 회의실과 사무실 사이를 로봇의 시선과 몸체를 빌려 이동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기존의 텔레프레즌스 이상으로 생산성을 극대화할 수 있습니다.
반면, 텔레프레즌스 로봇의 도입으로 인해 텔레프레즌스 기술이 지닌 가능성 중 이전까지 주목되지 않았던 부분의 활용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바로 존재감의 전송을 통한 공감의 전송입니다. 이 글에서는, 텔레프레즌스 로봇이 보여주는, 공감의 도구로서 로봇이라는 새로운 가능성에 대해 들여다보고자 합니다.
[사진 상단] 텔레프레즌스 룸을 사용하는 모습.
[사진 상단 출처] Telepresence –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사진 하단] 로봇회사 iRobot 의 Ava 500 video collaboration robot 이 사무실을 이동하는 모습.
[사진 하단 출처] Cisco, iRobot team up on video collaboration robot | ZDNet
공감 1 :야구장에 올 수 없는 소년을 대신한 시구자 로봇.
2013년 6월 13일. 닉 르그랜드(Nick LeGrande)의 열네번째 생일. 야구 팬인 소년은 오클랜드 어슬레틱스와 뉴욕 양키스와의 야구 경기에 시구를 하기로 했습니다. 가족의 응원이 들리는 캔자스 시티의 마운드 위에서 소년이 공을 던졌습니다. 그리고 포수 자리에서 기다리던 오클랜드 소속의 라이언 쿡이 한 공을 받았습니다. 쿡이 받은 공은 1800 마일 떨어진 캘리포니아 오클랜드의 홈 구장에서 시구 로봇이 던진 공이었습니다.
닉은 2013년 1월 재생불량성 빈혈(aplastic anemia)이라는 진단을 받았고, 이후 약해진 면역력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 이를테면 야구장,을 갈 수 없는 몸 상태가 되었습니다. 캔자스 시티에서 구글 파이버 사업이 우선적으로 시행되고 있었고, 고속 인터넷이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주는 캠페인을 하고자 했던 구글은 닉을 만났습니다.
구글은 캔자스 시티 구글 파이버 공간에 닉이 응원하는 캔자스 시티 로열스 팀의 홈 구장에서 가져온 흙과 잔디로 마운드를 만들고, 경기가 열리는 1800마일 떨어진 캘리포니아의 오클랜드 구장을 스크린에 비추었습니다.
닉이 던진 공의 구질과 속도가 실시간으로 처리되어 오클랜드 구장의 원격조종 시구 기계(telerobotic pitching machine)에게 전달되었습니다. 그 공을 오클랜드의 구원투수 라이언 쿡이 받아낸 것입니다.
닉의 집(캔자스 시티)에서 야구장(오클랜드, 캘리포니아)까지는 1,800 마일, 약 2,900km 거리입니다. 미국의 절반 가량을 횡단해야 도달할 수 있는 거리입니다.
[사진 출처] 구글 맵
로봇이 한 일은 디지털 신호를 전달받아, 특정 동작을 하도록 미리 프로그램된 대로 공을 뿌린 것입니다. 로봇이 닉의 시구를 전달하던 순간, 그것을 지켜보던 오클랜드 구장의 4만명 관중과 캔자스 시티의 소형 마운드에서 닉을 지켜보던 가족들과 친구들, 구글 직원들은 무엇을 떠올렸을까요? 닉의 성공적인 시구와 그것을 있게한 사람들의 노력과, 문제없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 기술.
원격로봇으로 시구한 소년의 이야기는 사람들에게 감동을 줍니다. 텔레프레즌스 로봇으로 인해 연간 비용이 수십만 달러가 절감될수 있다는 이야기와 닉의 공을 이어던진 로봇의 이야기는 전혀 다르게 들립니다. 당연하게도, 전자는 기업용 시장을 대상으로 하는 메시지고, 후자는 소비자용 시장을 대상으로 하는 메시지이기 때문입니다. 전자가 실현하는 것은 효율성을 향한 기업의 꿈이라면, 후자가 실현하는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연결되고자 하는 원초적인 꿈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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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신문] 희귀병 소년의 감동 시구…2900km 떨어진 곳에서 원격 로봇 조종
JTBC – 미국 희귀병 소년의 감동 시구 화제…2900km를 쏘다
14세 희귀병 소년의 감동 시구 영상 보니… – 경향신문
희귀병 소년의 감동 시구 “2900km 원거리 시구 가능했던건…” – 아시아경제
Kansas City boy’s first pitch delivered 1,800 miles away – KCTV5
공감 2: 교실에 올 수 없는 소녀를 대신한 공주 로봇.
닉의 시구는 이벤트이고, 원격으로 전달된 시구 행위는 일회적인 것이라 일상에서 반복적으로 수행되기 어려운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전달이 일상적으로 이루어진다면 어떨까요?
9살 소녀 렉시 킨더(Lexie Kinder)는 로봇을 이용해 대리 출석을 하고 선생님의 질문에 대답을 합니다. 만성 심장 질환(chronic heart disorder)으로 면역력이 약해져 학교 출석이 어려운 렉시는 어려서부터 홈스쿨링을 받아왔습니다. 렉시가 초등학교 3학년이 되던 해, 남캐롤라이나 섬터(Sumter, South Carolina)에 살던 가족은 VGo 라는 로봇으로 렉시의 원격 수업을 실험해보기로 했습니다.
[사진 상단] 렉시의 로봇이 쉬는 시간 동안 렉시의 친구들과 함께 교실을 이동하도록 렉시가 조종하고 있습니다.
[사진 상단 출처] For Homebound Students, a Robot Proxy in the Classroom – NYTimes.com
[사진 하단] 렉시가 자택에서 원격의 로봇을 조종하고 있습니다.
[사진 하단 출처] Robots Lead the Way to the Classroom – Slide Show – NYTimes.com
인터넷으로 연결되어 상호 인터넷 영상 통신이 가능한 VGo 로봇에게 렉시가 분홍색 주름치마를 입혀주고나서, 지어준 이름은 VGo 공주님(VGo Princess) 였습니다. 교실에 자기 자리를 잡은 렉시의 로봇은 선생님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 분홍색과 녹색 불빛을 깜빡였습니다. 친구들은 신나게 “렉시”라고 외칩니다. 렉시의 음성은 로봇에 전달되고, 선생님은 렉시를 칭찬해줍니다.
교사들은 교실에 로봇을 두는 것이 학생들을 산만하게 할까봐 염려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곧 학생들은 로봇이 원래 거기 있었던 것처럼 적응했을 뿐만 아니라, 자기의 교실에 로봇이 있다는 것을 특별하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로봇이 매일 아침 켜질 때마다 소리치며 좋아하기까지 할 정도니까요.
치료 목적으로 집이나 병원에 머무를 수 밖에 없는 미국 내 2만3천여명의 학생들은 이러한 원격존재 로봇을 갖고싶어합니다. 하지만 VGo 와 같은 원격-존재 로봇(Remote Presence Robot)은 아직 비쌉니다. VGo 의 경우 6000달러(약 700만원)에다가, 유지비용으로 매년 1200달러(약 140만원)가 추가로 들어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직까지는 주정부나 장애학생 지정기탁금의 기금으로 구입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VGo 로봇을 학교에서 목적으로 지금껏 구입한 경우는 40건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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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프레즌스가 기업 시장으로부터 소비자 시장으로 오면서 이 기술이 지닌 잠재력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존재의 전달이 내포한 공감의 전달. 이 기술의 후면에 숨겨져 있거나, 전면으로 드러나지만 정확히 분간하기 어려운 특징 두가지를 정리해보고자 합니다.
기술적 측면 1. 네트워크 : 더 빠른 것이 더 실감나는 것이다.
쌍방향 영상을 위해서는 빠르고 안정적인 무선 네트워크가 필수적입니다. 영상통화는 서로간의 세션이 연결될 동안만 비디오 스트림이 오가지만, 원격존재 로봇의 경우는 일단 켜져있는 동안은, 예컨대 렉시의 로봇은 등교 때부터 하교 때까지의 반나절 동안, 무조건 비디오 스트림을 받아야하고 보내야합니다. 업무용으로 포지셔닝된 iRobot 의 Ava 500 에 장착된 21.5 인치의 모니터는, 렉시의 VGo 의 5인치 스크린과 비교해보면 16배 넓은 면적이고, 당연히 더 많은 대역폭을 필요로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가급 인터넷 망 도입을 시도하는 구글 파이버에서 닉의 이벤트를 후원하고, Verizon 이 VGo 로봇을 자사 광고에 실은 것처럼 통신회사들이 원격존재 로봇에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시스코 역시 iRobot의 원격 존재 로봇과 결합하여, 자사의 데스크탑 기반의 원격존재 영상통화 솔루션인 Cisco TelePresence™ EX와 무선 접속 포인트 Aironet 1600 를 홍보하고 있습니다.
결국 인프라 역할을 하는 네트워크 사업이 더 빠른 무선 인터넷 기술을 발전시키는 동안, 함께 커갈 애플리케이션 사업 파트너 역할을 하는 것이 텔레프레즌스 로봇 사업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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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적 측면 2. 인간-로봇 상호작용: 대리인이 자신을 드러낼 때
렉시의 로봇은 렉시의 존재를 원격으로 전달하는 일종의 대리인(Proxy) 역할을 수행하면서, 사람들이 로봇을 어떻게 수용하는가에 대한 새로운 질문을 던집니다. 렉시의 로봇은 렉시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렉시의 친구들은 렉시의 로봇을 향해, 정확히는 로봇의 스크린에 띄워진 렉시의 눈을 마주치며, “렉시 안녕”하고 인사를 건넵니다. 렉시 역시 마우스로 렉시를 운행하거나, 교사의 주목을 얻기 위해 플래시를 쏩니다. 원격의 대리인이 주인의 의사표시를 전달할 수 있도록 플래시를 사용하는 방법은 QB 텔레프레즌스 로봇 등에서 먼저 선보이기도 한 기능입니다.
렉시와 친구들 사이, 렉시와 선생님 사이에 매개 역할을 하는 로봇은, 여태까지 매개 역할을 한 어느 기술보다 더욱더 이질감을 드러내고 기술 자체를 드러냅니다. 전화가 사람들 사이에 목소리를 전달할때 손에 쥔 송수화기가 그들 사이에 놓인 기술입니다. 심지어 통화하는 동안은 귀에 대고 있느라, 눈에 보이지도 않습니다. 영상통화하는 동안 스크린의 프레임 혹은 베젤은 사람들의 초점 밖으로 자연스레 밀려납니다. 반면 텔레프레즌스 로봇은 무시하기에는 너무 눈에 띕니다. 사람만한 키를 갖췄으면서, 사람의 뼈대만 겨우 흉내내었기에 이질적인 존재로 보입니다. 인간의 얼굴 높이에 달린 모니터로 달랑 얼굴만 비춰지는 모습 역시 전혀 일상적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텔레프레즌스 로봇과 그를 둘러싼 원격지의 사람들 사이의 상호작용은 아직까지는 제법 성공적인 것으로 보입니다.
인간-로봇 상호작용(HRI: Human-Robot Interaction) 의 미래는 완전한 타자인 로봇과의 인터액션에 놓여있기보다는, 중간에 수많은 인공물의 매개로 연결된 사람과 사람의 상호작용에 있지 않을까요? 매개 역할을 하는 인공물은 형태면에서는 이질적이지만 전달되는 내용 자체는 사람의 것을 복제해 전달할 뿐인 텔레프레즌스 로봇일 수도 있고, 사용자의 맥락과 의사를 자동으로 파악하여 상대에게 알리는 대리자 역할을 수행하는 지능형 에이전트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이폰의 시리의 미래가 비슷할 지 모릅니다. 그리하여, 대화에 참여하는 사람도, 의사소통을 매개하는 과정 중 어느 지점부터 이질감을 느끼고 어느 지점부터 동질감을 느끼는지 경계와 성분에 대해 명확히 분간하기 어려울 수 있는 상황이 미래의 커뮤니케이션의 한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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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를 전달하는 전화가 생산성의 도구인 동시에 공감의 도구인 것처럼, 존재를 전달하는 텔레프레즌스 로봇이 생산성의 도구인 동시에 공감의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 텔레프레즌스 로봇이 전화만큼 대중적인 커뮤니케이션 수단이 될 수 있을까요? 무선 네트워크 기술의 발달, 텔레프레즌스 로봇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그 길의 모양을 결정지을 것입니다.
[더 보기]
[1] 현욱, 강신각, “스마트워크 표준화 동향 – 텔레프레즌스를 중심으로 –” 전자통신 동향분석, 제26권제2호, 2011. 4., pp.24-29
의사의 아바타 – The Avatar Will See You Now | MIT Technology Review